1. 중국
(1) 고구려인은 30여만 호 100여만 명에 불과
(2) 고구려 멸망 당시 인구
① 15만 호, 70여만 명으로 추산
② 고구려인의 대부분은 중국인에 동화
(3) 중국 역사서 : 고구려 당시 통상 1호당 인구는 6∼8명
(4) 《구당서》
① 쑤저우(蘇州) 인구, 7만6,000여 호에 63만 명
② 항저우(杭州) 인구, 8만6,000호에 58만 명
③ 덩저우(登州) 인구, 2만여 호에 12만 명
→ 고구려 인구 : 15만 호일 때는 105만 명이 되고, 30만호일 때는 210만 명
※ 중국 학자들이 중원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고 주장하는 숫자보다 고구려 옛땅에 남아있는 인구가 훨씬 많아진다. 따라서 고구려인이 대부분 한족(漢族)에 동화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2. 멸망 후 140만여명 잔류 추정
(1) 고구려
① 70년간(598∼668년) 전쟁으로 전국이 황폐
② 당나라와의 싸움에서만 12만 명이 피살
③ 포로도 8만5,000명이 넘었다
④ 고구려와 요동·요서 일대는 호당 평균 인구가 3인 전후로 격감
(2) 《구당서》 지리지 : 1호당 평균 인구가 3.3명
① 요동 인구 : 5,718호에 1만8,156명(3.2명)
② 영주(營州) : 997호에 3,789명(3.8명)
③ 요서 : 611호에 1,896명(3.1명)
④ 안동도호부 : 5,718인에 1만8,156명(3.2명)
※ 15만 호일 경우 고구려 인구는 50만 명 전후(30만 호의 경우 100만 명) : 70년 전쟁 동안 피살(12만 명), 포로(8만5,000명), 강제이주(42만 명)된 수가 62만5,000명 + 발해, 신라 귀화인 → 고구려인은 거의 없어지는 결과
(3) 《구당서》의 69만7,000호라는 숫자와 1호당 인구를 재조명할 필요성 존재
① 7세기 후반기 전란 등으로 고구려 인구가 호당 3.3명 전후였을 것이라는 추산 : 멸망 당시 고구려 인구는 230만 명 정도
② 고구려 멸망 뒤 강제이주되거나, 포로 및 귀순자가 된 수 + 신라에 귀화한 인구 → 약 71만 명 + 대조영을 따라간 인구를 10만여 명 → 80만여 명이 줄었을 것
(4) 멸망 당시 고구려인 : 140만 명이 넘는 수가 옛땅에 그대로 남은 것
① 이들 중 일부는 신라에 흡수
② 대부분이 발해인
→ 고구려 옛땅에 20만 명 정도 남았다거나 고구려인 대부분이 중국에 동화됐다는 중국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3. 신라와 합세해 대당 투쟁
(1) ≪삼국사기≫
① 중국(당)에 항복한 곳은 목저성과 남소성 등 11곳
② 항복하지 않고 버틴 곳이 안시성, 요동성, 북부여성 등 11곳
③ 항복하지 않았지만 성민이 도망한 곳이 적리성 등 7곳
(2) 안시성, 요동성 등 옛 고구려의 군사 요새
① 당나라 군사에 정복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강력한 반당운동의 거점이 된 것
② 고구려 유민 대부분이 중국에 흡수됐다면 만주에서 669년부터 680년까지 12년간 계속 반당 운동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③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 : 옛땅에서 조국을 되찾고 당군을 몰아내는 저항운동을 계속
④ 안승(安勝) : 4,000여 호의 주민을 이끌고 신라로 넘어와 대당 항쟁 → 평양 일대의 고구려 백성들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북쪽으로 추방
⑤ 670년, 검모잠(劍牟岑) : 당에 협조하던 중인 법안(法安) 살해 → 안승을 모시고 '고구려국'을 세우고 신라군과 합세해 대당 항쟁을 주도
4. 당
(1) '고구려 유민의 이반(離叛)'이 두려워 강제 이주를 계속 시행
(2) 고구려 유민과 신라가 합세하는 것도 적극 저지
(3) 북방민족의 위협으로 수도 방어 : 어려운 고구려 부흥운동 대책
(4) 고덕무를 상징적인 고구려 계승자로 삼아 '소고구려국'을 요동에 세워 고구려 유민을 회유·억압
5. 고구려
(1) 고구려 유장(遺將) 고연무(高延武) + 신라장군 설오유(薛烏儒)
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서 당군에 크게 승리
② 전투 주역 : 요동지방에 머물던 고구려인
(2) 당(唐)
① 고간(高侃)을 사령관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 → 안시성 공격, 실패
② 평양 침공, 퇴각
③ 672년, 대규모로 재침입 → 신라군의 도움을 받은 고구려인의 저항으로 실패
6. 신라, 고구려 유민 협력으로 대당(對唐)전쟁 승리
(1) 671년(문무왕 11년) : 신라와 당이 전면 전쟁에 돌입한 해
① 장군 죽지(竹旨)의 신라군 : 석성(石城,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서 당군 5,000여 명을 죽이는 전과 올림
② 당 : 설인귀를 통해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문무왕에게 보냄
(2) 675년, 매소성(買肖城, 경기 연천군 청산면)에서 당의 20만 최정예 부대를 대파 : 당군 6,000여 명 희생
(3) 고구려 유민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 : 대부분 옛땅에 머물면서 때로는 신라군과 협조하고 때로는 단독으로 대당 항쟁 수행
자세히 보려면 여기 클릭
'동북공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북공정의 논리 ⑦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인가? (0) | 2019.10.21 |
---|---|
동북공정의 논리 ⑥ 고려는 신라 후예국인가? (0) | 2019.10.21 |
동북공정의 논리 ④ 고구려와 수(隋)·당(唐)전쟁 (0) | 2019.10.21 |
동북공정의 논리 ③ 고구려·중(中)의 조공과 책봉 (0) | 2019.10.21 |
동북공정의 논리 ② "고구려, 중(中)군현서 건국·발전"은 허구 (0) | 2019.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