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군위안부 피해자 김영숙 할머니 증언
“열두 살짜리 질, 칼로 째 위안부로 투입”
북측 군위안부 피해자 김영숙 할머니를 평양에서 만났다. 끌려갈 때 나이는 불과 열두살. 일제는 부모 잃고 배가 고파 지주집 몸종이 된 식민지소녀를 끌어다 질을 째 위안부로 투입했다!
2002년 1월 23일 아침 9시 25분 평양 고려호텔 면담실 앞. 150㎝도 안될 작은 체구에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한 분이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숙(75). 북측의 군위안부 피해자. 가파른 이력과는 달리 천진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면담실에 나란히 앉자 할머니는 기자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덥석 잡고 말했다.
“에구, 서울서 예까지 오느라 애썼소? 어디 앓는 데는 없고?”
2001년 말 방북취재가 결정된 후 기자는 북측 군위안부 피해자 인터뷰를 위해 1백개 정도 문항의 질문지를 작성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첫 마디에 모든 ‘공식적 틀’은 무너져 버렸다.
“할머니 얘기 듣고 싶어 왔어요.”
이후 두 시간동안 기자는 할머니의 한평생을 들었다. 간간이 기자가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였다. 할머니의 육성을 지상중계 한다.
지주 셋째 첩의 몸종 국순네
나는 평안북도 태천군 학봉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생일은 1927년 1월 24일인데 우리 아버지 둘째 딸입니다. 언니 하나 남동생 둘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놈들한테 끌려서 광산에 가서 일하다가 그놈들한테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반신불수래 됐습니다. 오륙을 못쓰니까 살기가 바빠서 우리 어머니가 달아납니다. 그래서 내가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 데리고 짚신짝 질질 끌고 밥 얻으로 3년 다녔습니다. 우리 아버지 밥을 얻어 먹이다 못해 열살 나던 해 아버지 이불 덮어놓고 내가 지주집으로 갔어. 지주의 셋째 첩의 몸종으로 가서 진짜 발 씻겨라, 머릴 감겨라, 아래까지 씻겨라…. 잘못 씻으면 그 물에 내 머리를 잡아 담급니다. 물길어 오라 해 물동이 이고 가다가 물동이가 쭉빠지면 모가지가 흔들어 져서 혼이 나고…. 고된 종살이 못 견뎌 달아나면, 달아나 봐야 고모 집, 삼촌 집이니까 일본놈 순사 보내 잡아옵니다. 나 이거 살면 뭐하간 싶어 치마에 돌멩이도 싸보고 모가지도 맸지만 잡혀서 못죽었습니다.
할머니 종살이시키는 대신 아버지는 지주집에서 돌봐주었습니까?
돌봐주긴 뭐이 돌봐줘? 얼어죽고 굶어죽었지. 아버지 시신도 어디 갖다 버렸는지 아직도 몰라.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종살이 한 지 3년 되는 해 하루는 일본놈 순사가 저녁에 와서 사흘을 쑥덕쑥덕합니다. 그러더니 그 일본놈이 날더러 “야 국순네야 너 나하고 돈벌이 하러 가자. 너 엄마도 만나보고 언니도 만나보고” 합니다.
국순네라니요?
난 이름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도 없고 그저 국순네라고 불렸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김영숙이란 해방후에 호적 정리할 때 내가 지은 이름입니다. 그래 일본놈 순사가 깜장고무신 하나 사주니까 따라갔습니다. 기차 타고 연락선 타고 일본까지 끌려갑니다. 가니까 처녀들이 많은데 내가 제일 어렸습니다. “넌 왜 왔나?”하기에 “돈벌이 하러요”했더니 “쬐그만게 무슨 돈벌이” 합니다. 또 가자고 해서 배타고 며칠, 기차 타고 며칠, 마차 타고 며칠을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가 중국 심양이라 합니다.
문 끼익 열고 들어가니까 붉은 당화 낀 사람만 있지 조선사람 하나 안보입니다. ‘야, 여기가 어디메가’ 하는데 총 찬 일본장교놈이 하나 오더니 기다랗게 늘어선 방 중에서 저 끝방으로 들어가라 했습니다. 이거 다 조선말로 합니다. 지주집서 날 테려온 순사 놈이 ‘야 국순네야 나 간다, 말 잘 들어라’ 하기에 와락 겁이 나서 나도 쫓아가겠다고 매달렸는데 셰파트를 한마당 내놓습니다. 모두 각 방이고 밖에서 문을 걸고는 위생실에 가겠다고 할 때만 일본 놈 보초가 와서 데리고 나갔다 다시 가둡니다.
그렇게 사나흘 두어두더니 장교 한 놈이 척 들어옵니다.
“너 이름 뭐야?”
“국순네….”
“국순네가 뭐야? 넌 오늘부터 오카다다.”
그 놈은 일본 옷을 하나 던져주고 내 치마를 훌떡 들치면서 ‘이걸로 갈아 입으라’했습니다. 안 입고 가만 있으니 “안 입겠나” 소리치는데 무서워서 입고 있었습니다. 툭 헤치면 벌거벗어지는 그런 옷입니다.
한 이틀 잘 둬두더니 그놈이 또 들어왔습니다.
“나는 나카무라다. 야 요거 조선 계집애 참 곱구나. 한번 놀아보자.”
열두 살 난 거하고 놀아보자는 게 뭡니까? 자기가 척 벌거벗고 아래를 내놓고는 “이거 안부럽나? 안부럽나” 하면서 다가오는데 엄마 엄마 하면서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뛰니까 “요놈의 에미나이 말 안듣겠나” 소리치면서 잡아 닥칩니다. 안달복달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뛰어도 누구 하나 도와줍니까? 그 놈이 잡아닥치더니 내 아래를 손칼로 이리 찢고 저리 찢고…. 피바다가 된 방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귀를 의심했다. 할머니가 말한 ‘아래’는 질이였다. 그런데 왜 성노예로 잡아온 어린 소녀의 질을 칼로 찢은 것일까?
며칠 그대로 놓아두더니 그 놈이 기세등등해서 또 들어옵니다.
“너처럼 천황폐하 위대한줄 모르고 거역하는 년은 간을 내먹어”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더니 구둣발로 내 다리를 꺾고 칼로 배를 찢어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젖까지 오려놓고….
“천황 폐하 거역하는 년은 배를 갈라”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기자가 “배를 좀 볼 수 있을까요?” 했더니 할머니는 웃옷을 들어올려 상처를 보여주었다. 젖가슴 사이에서 배꼽 아래까지 일직선으로 칼자국 흉터가 뚜렸했다. 왼쪽 젖가슴에도 칼자국 흉터가 남아있었다. 64년이 지났음에도.
60년 전 상처 자국이 이정도로 라면 당시 상처가 깊었을 것 같은데 치료는 해 주었습니까?
치료는 무슨 치료? 치료해줄 놈들이 그런 짓 하겠소? 나이가 어리다보니 한 열흘 지나니 상처가 저절로 아물은 거지요. 아래라는 것은 다 헤쳐놓고…. 그러고 나서는 일본놈들이 하루에 열이나 들어오면 좋지요. 20~30명이 타고 앉으니…. 일본놈들은 이놈 저놈 다 똑같아. 나은 놈이란 하나 없어. 어느 놈이나 저할 짓은 다하고 가니까. 그 때 나이가 좀더 많았으면 어차피 대줄 수밖에 없갔구나 생각해서 상처가 덜 났을텐데 철모르는 열두살짜리인데다 밥을 얻어먹던 이악스러운 것이 돼서 더 많이 당한 것 같습니다. 꺽고 찌르고 째고 담배불로 지지고…. 내 몸뚱이는 몸뚱이가 아닙니다.
밥이라는 것은 보리밥 한 덩이에 염장무, 혹은 통강냉이 삶은 것을 주는데 그것도 많이나 주면 좋지, 나야 쬐그마니까 낫지만 큰 아이들이 그것 먹고 삽니까? 물도 잘 안 갖다 줍니다. 오줌 누러 자주 가겠다고 하면 문 열어주기가 귀찮으니깐 그랬겠지.
그 집에 모두 스물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복례라는 여자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배가 내밀어지니까 어느 날은 그 여자를 까꾸로 매달았습니다. 말 안 듣는다고. 그리고는 우리들을 모두 불러내서 둘러 세워 놓고 그 여자한테 호통을 쳤습니다.
“이시꼬(복례의 이름), 너 말 듣간? 안 듣간?”
그 여자가 죽어도 안 듣겠다고 악을 쓰니까 까꾸로 매단 채로 어른배, 아이배를 칼로 뚝뚝 잘라서 우리 모가지에다 걸어주는데 모두들 소리를 지르고 가무러치고…. 복례는 그날 죽었습니다. 내가 그곳이 중국 심양이란 걸 안 것도 그날입니다. 둘러 세워놓았을 때 옆의 큰 아이에게 몰래 물었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중국 심양이란다. 야, 암말 마라. 보초가 쏜다.”
각 방에 가둬놓고 서로 말도 못하게 하니 중죄인보다 더하지 뭐.
죽은건 복례 하나가 아니지요. 내가 1939년도에 가서 5년을 잽혀 있었는데 그동안 스물다섯 중 스물이 죽었습니다. 다섯 남은중 한 아이래 스물너뎃 났는데 어느 날 뛰어넘다가 잽혔죠. 총으로 쏴 죽이면 차라리 일없지, 매달아 놓고 때리고 쇠꼬챙이로 지지고… 아래까지 지집니다. 그러는 것 보면 우리 다 가무러칩니다. 1945년 3월 쯤인가 키가 두 미터는 넘을 듯한 큰 조선사람 노동자 하나가 짐 지고 조선사람 식모한테 왔다가 살짝 나한테 말하기를 ‘너 살려면 내말 들어라’ 합니다. 뛰라는 겁니다. 5m나 되는 철사망이 둘러쳐진데다 총맨 보초가 지키고 셰파트들을 한마당 풀어 놓은 데서 어떻게 뛰나 했는데 가르쳐주는대로 구텡이에 가서 뛰었는데 살 놈이니까 살아집디다.
거기서 중국 심양이라는데 길을 압니까? 다시 잽혀가면 어떡하나 해서 산 속을 헤매고 가시덤불을 헤쳐서 압록강까지 왔습니다. 다행이 좋은 사람들 만나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 몸으로 고향 갈 수가 있습니까? 간들 부모가 있습니까? 순사놈이 다시 잡아 갈텐데. 그땐 수풍발전소(김 할머니의 고향인 평북도 태천과 가까움)가 꽝꽝 돌아갈 땐데 거기서 일해주고 살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습니까?
평북도 구성 역전식당을 한 40년 댕기면서 거기서 늙었습니다.
해방된 해에 열 여덟이셨는데 결혼할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일본놈들한테 하도 고역을 당하다보니 남자라면 질겁을 해서 뛰니까…. 시집간다 한들 아래가 허궁이 되어 있으니 누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남쪽 위안부들 꽝꽝 나서, 50년 다문 내 입이 터졌어”
주위에서 왜 시집 안 가느냐고 말 듣지 않았습니까?
지난 일을 동생들, 동무들에게도 입 벌리지 못하고 살았으니까 남의 속도 모르고 시집가라고들 했시오. 그러면 그저 나 시집가고 싶지 않다, 일만 하고 살겠다 했는데 이웃에서는 저 여자 고지다 병신이다 그랬시오. 아이라도 하나 얻어서 기르지 하는 말도 들었는데 아이 기르는 것 한번 본 일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아이를 기릅니까? 그래 난 아이 안 고와하고 뿌리쳤는데 고지라서 아이도 안 고와한다고들 했지요. 서방도 모르고 자식도 없이 그저 국가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살면서 누구한테 사랑도 못 받아 보다가 직장에서 당비서 동지가 그저 “우리 영숙이 잘한다 잘한다”하니까 그것이 그렇게 좋아서 집에도 안 가고 밤낮 거기서 자면서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입당도 했고 직장에서 표창도 받고 상품도 타고 팔다리 못쓰는 것, 방광염, 대장염, 같은 염증들 치료도 받고 요양도 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연로보장(정년퇴직)전에는 식당 지배인까지 했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지배인이라면 남쪽으로 치면 사장이다. 식당 노동자에서 출발해 지배인까지 지냈다면 당당히 사회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김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통과 아픔을 평생 일속에서 스스로 달래온 셈이다.
그래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있었다.
지난 날의 고역에 대해 처음 증언하신 것이 언제입니까?
1991년도입니다.
1991년도라면 북측에서는 위안부 문제 증언이 시작된 첫 해에 남보다 먼저 증언하신 셈인데 망설이지는 않았습니까?
남쪽 위안부들이 텔레비에 나와 일본놈들 때려부셔야 한다고 꽝꽝 말하는 걸 보고 이제 말해야 되갔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고생했다는 것, 우리 이케 다 베려놨다는 것, 평생 벌리지 못했던 입을 그제야 벌렸습니다. 한번 말이 터지니까 이제 쌍말이든지 아무 말이든지 꽝꽝 다하고 싶습니다. 다하고 삽니다.
할머니가 고생하신 얘기를 증언하시고 난 후 주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내 기사가 신문에 나니까 그것 들고 와서 왕왕 울지요 뭐. 그케 고생 많이 했구나, 그래서 결혼도 안 하고 새끼도 안 기르려고 했구나, 정말 할머니 불쌍하다 어떻게나 도와야겠다. 불쌍하다 불쌍하다 하기에 나 하나도 안 불쌍하다 했습니다. 전체 인민이 다 내 아들 딸인데 뭐. 지금 우리 집에 와서 내 아들딸 하겠다는 거 많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모두가 죽을 먹을 때도 나는 한 숟가락이라도 더 잡수시라면서 특별배급해 주었습니다. 나 지금 사는 곳이 온천(평남도 온천군)인데 자연수로 따뜻한 물이 좔좔 나와서 온천입니다. 바다를 끼고 있으니 조개도 많고 물고기도 많고 살기 좋습니다. 산원, 구안리 병원, 적십자 병원 다 댕기면서 치료받아 일흔 여섯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죽으면 당에서 장사 지내 줄겁니다. 나 근심 걱정 하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떡하든 일본놈들 하고 계산을 하고 눈을 감아야지, 이대로는 억울해서 내 눈에 흙이 못 들어갑니다. 돈 몇 푼 받자는 거 아니고 우리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겁니다.
잊음은 죄악이다
1월 23일 김영숙 할머니와 인터뷰한 후 기자의 뇌리에는 ‘아래를 칼로 찢었다’는 증언이 계속 맴돌았다. 왜 성노예로 끌어온 어린 소녀의 질을 칼로 찢었을까. 서울에 돌아와 보훈병원 심재식 선생(산부인과 전문의)에게 구한 뒤에야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연행 당시 김 할머니는 체구도 작고 영양상태도 좋지 않아 질이 성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상태에서 성행위를 강행하면 질이 파열될 것이므로 미리 칼로 째서 질을 넓힌 것 같습니다. 분만 때 출산을 돕기 위해 질을 절개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분만 후에는 의학적 처치로 질을 봉합해서 원상 회복시키지만 김 할머니의 경우는 절개된 그대로 제멋대로 아물어 방치되어 있을 겁니다. 질은 혈액공급이 많은 곳으로 그 같은 행위는 잘못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 행위를 한 장교는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이시이부대의 경우처럼 일제에 동원된 의료인들의 사고방식이란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격이었다. 열두 살난 어린 소녀의 질을 칼로 째서 성노예로 혹사 시켰다….
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 것일까. 김 할머니의 ‘아래가 허궁이 되어 있으니’ 하는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일본 당국의 변명과는 달리 일본군 군위안부 문제가 ‘조선여성이 계획적,조직적,집단적으로 일본군 군대에 강간당한 문제’라는 점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제는 강간이나 탈영, 성병 감염으로 인한 군 전력 손실을 막기 위해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위안부들은 군수품이자 소모품이었다. 일본 군경이 조선여성들을 강제 연행해 폭력적으로 성노예 생활을 강요했고 반항하거나 병들면 죽이거나 내다버렸다. 때문에 조선여성 위안부라는 ‘군수품’은 점점 넓어지는 전선과 함께 점점 더 많이 공급되어야 했고 급기야 김영숙 할머니와 같은 열두 살짜리 소녀까지 끌어가게 된 것이다.
이번 취재처럼 취재원에게 꼬치꼬치 묻거나 주위에 조언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였다. 취재기자가 이 정도니 김 할머니가 ‘50년간 입을 벌릴 수 없었던’ 심정은 어땠을 것인가. 그러나 할머니는 50년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역사의 증언자이자 ‘위안부 운동가’로 새로 태어나 있었다. 헤어질 때 김 할머니는 기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인민이 다 내 아들딸인데 이제 남쪽에도 아들딸이 있는걸 알았어. 내 억울한 얘기 들으러 서울서 예까지 찾아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우리 꼭 힘을 합쳐 일본놈들 계산하자구”
군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의 책략은 ‘지연전술’이다. 계속 시간을끌면 대중적 관심은 줄어들고 ‘명백한 증거’인 할머니들은 세상을 떠나 사건은 세상에 묻히고 말 것이라는 속셈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은 명백하다. 결코 잊지 말고 신속하면서도 끊임없이 일본측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란 남과 북을 말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잊음은 죄악이다.
출처 : 민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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