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대구
① 조선시대 경상도 :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불림
② 임진왜란때 대구
ⓐ 왜군 주력 부대의 북상요로(北上要路)
ⓑ 왜군의 후방 주요 보급기지로 후방 경비병이 계속 주둔
ⓒ 의병이 일어나는 것이 시기적으로 늦다.
ⓓ 활동 : 공산성안과 대구 주변의 청도, 화원, 월배 등지에서 간헐적인 소규모 유격전으로 적을 교란시키는 정도
ⓔ 극심한 식량 부족 : 의병을 계속 유지하기가 곤란, 존재가 미약
ⓕ 정유재란때도 의병 활동 미약
③ 대구의 지리적 중요성이 크게 인식
ⓐ 경상 감영 설치
ⓑ 큰 고을로 성장하는 계기
④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 동화사에 ‘영남승군사령부’(嶺南僧軍司令部) 설치 : 승군 조련, 지휘
ⓑ 증거 : 봉서루(鳳棲樓) 뒤편에 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현판
⑤ 곽재우(郭再祐)
ⓐ 경남 희령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킴
ⓑ 현풍, 창녕, 영산, 진주 등에서 승리
ⓒ 정유재란때 창녕 화왕산성을 수비
⑥ 곽준(郭䞭)
ⓐ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킴
ⓑ 김면 부대에 들어가 거창 등의 전투에서 승리
ⓒ 정유재란때 함양 황석산성을 수비하다가 전사
⑦ 일본인 김충선(金忠善) 귀화
ⓐ 사야가(沙也可)
ⓑ 왜의 조선 침략은 대의에 어긋난다며 부하 3000명을 이끌고 부산항에 상륙한 지 8일만인 4월 20일 투항
ⓒ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였으며 차마 예의의 나라를 침노할 수 없다”
ⓓ 화포, 조총 제조법 전수
ⓔ ‘삼란공신’(三亂功臣)
ⓕ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정착
ⓖ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
⑧ 중국인 두사충(杜師忠) 귀화
ⓐ 이여송(李如松)의 일급 참모
ⓑ 조선과의 합동작전때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
ⓒ 전쟁이 끝난 후 귀화
ⓓ 현재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하사 받음
ⓔ 경상도 감영을 대구로 옮기자 그 땅을 내어 놓고 현재 계산동 일대 두씨(杜氏)의 세거지로 옮김
ⓕ 명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가 생각나 최정산(最頂山) 아래로 주거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으로
ⓖ 모명재(慕明齋)
- 수성구 만촌 2동 716번지 남부정류장 부근
- 두사충을 포함하여 임진왜란때 조선에 귀화한 5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